증명과 증거의 패러독스 _ 정현
2011-04-28 14:09:14 , Tuesday

증명과 증거의 패러독스 :       이민호  «증명사진»
                                
                     " 회화는 도상에, 사진은 지표에 속 한다” -레지스 드브레

이민호의 사진의 대상은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녀 작업에서 드러나는 영속적인 테마이다. 나는 우선 “증명사진” 작업에 대한 글을 쓰기 앞서 이민호의 회화작업을 언급해야 할 것 같다. 그 이유는 이민호가 사진작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이번 작업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평면성을 다루는 회화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사진이란 매체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민호의 화두는 인간탐구 였다. 문학을 전공한 이력 때문인지 그녀의 회화언어는 문학적/서술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회화작업에서의 인간은 인간의 형상들이었다. 캔버스 공간 안의 인간들은 우리 모두이면서 동시에 그 누구도 아닌 그저 환영이거나 그림자 같은 인간 형상들의 제시였다. 때론 집단적이면서 때로는 해체되곤 하는 회화 속의 인간(인물이기에 그 형상들은 추상에 가깝다)은 객체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관객들은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더불어 또 다른 자아(타자)의 관념을 끌어내기도 한다. 돌덩이 같은 두상이 화면 전체를 채우고 있는 그녀의 회화작품은 사뭇 공격적이다라는 감상까지 전달하곤 한다. 그러나 이민호의 사진작업은 같은 테마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서정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듯 하다. 회화의 도상적 접근에서 사진의 지표적 접근은 작가에게 자신의 주변과 일상을 작업으로 편입시키는 데 상당한 일조를 한 것이 분명하다.


주관적 지표성

이민호의 사진모델 들은 자신의 주변 인물들이다. 혼자만의 오랜 외국생활에서 자신을 드러내게 하는 존재란 결국 타인들이다.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만이 자신일 수밖에 없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민호의 회화 속의 인간들은 인물이 아닌 존재의 덩어리 또는 인간으로 형상화된 단위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진 속의 인물들은 감상자에게 자신을 투영해야 하는 강박증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들은 그저 이미지로 우리 앞에 그렇게 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증명사진연작” 안에 서있는 인물들을 증명하거나 확인할 수 없다. 사진 안의 인물들 역시 그저 인간일 뿐 관객에게 조금의 지표적 이미지는 ‘봉사’하고 있지 않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증명사진” 안의 인물들의 눈 부분을 앵글 밖으로 내몰아버린다. 얼굴의 반이 사라져버린 즉, 시선과 응시가 제거된 이미지들은 증명사진으로서의 재현적 지표의 가치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시뮬라시옹의 세상이란 바로 이런 것 아닌가. 앵글 밖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증명사진”이란 제목 자체가 역설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증명사진들은 그 무엇도 증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의 일상과 작가의 주변 그리고 사진의 시간성만을 확인시켜주는 ‘증거’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증명사진들은 그저 작가 개인적인 흔적의 묶음만을 의미한다는 것인가?

객관적 지표성

물음에 답하기 전에 “증명사진” 작업의 과정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작가는 사진을 찍은 후 일반 사진관에 인화를 맡긴다. 그리고 맡긴 사진을 찾는 과정에서 작가는 “영수불가(NON FACTURE)"라는 스티커가 붙은 인화된 사진들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의 의도-은폐 또는 불확실성의 인물-는 인화를 담당하는 엔지니어에게 잘못 찍은 사진으로 받아들여졌고 결국 보편적인 시각에서 이민호의 사진들은 부적당한 또는 무의미하기에 버려야 하는 사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민호의 ”증명사진“은 사진의 재현적 지표에 어긋나는 이미지들인 것이다. 이 이미지들은 사회적으로 그 무엇도 증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인간 자체의 존재보다 우선 시 되는 것이 바로 신분증이며 시리얼넘버이며 더불어 왼쪽 구석에 위치한 조그만 증명사진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클레망 로쎄의 말처럼 ”이 세상은 그저 기만적인 복제물인 것이다“. 공적 공간에서 내가 나일 수 있는 증거는 증명사진과 숫자로 분류된 약속이 전제되어야 한다. 눈이 제외된 혹은 사진교본에서 지시하고 있는 아카데믹한 구도가 아닌 인물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폐기되어버리는 것이다. 무균의 엘리트 사회는 손바닥에 잡히는 카메라 공간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하지만, 바로 이 부분이 이민호의 작업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녀의 증명사진은 결국 개인적 흔적의 증거물이자 제도화되어 있는 현대인의 시각을 증명하는 증거물인 셈이다. 증명사진의 이미지는 부정과 역설을 통해 그 의미를 갖게 되는 것 역시 인상적이다. 롤랑 바르트는 ”밝은 방 La chambre claire"에서 인물사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초상-사진(photo-portrait)은 강력한 힘의 견고한 장(場)이다.  초상-사진은 모두 네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로)나는 내가 믿는 나이며, 동시에 (두 번째로)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길 바라는 존재이며 (세 번째로) 사진작가는 나를 확인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진작가는 그의 예술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끊임없이 나를 닮아가고 그리고 나를 사진에 그대로 드러낸다 (그러나) 나는 필연적으로 진실이 아닌 것에 대한 느낌, 게다가 속임수에 가까운 그 느낌에 의해 묘한 떨림을 느끼곤 한다.”

응시와 시선이 사라진 사진은 증거이자 환영이다. 그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빛과 거울의 반사로 만들어진 사진의 이미지는 언제나 환영이었으며, 그 사진 안에서 자신을 확인하고자 하는 반응은 언제나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다. 복제된 이미지는 언제나 자신의 시뮬라크르 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초상-사진 안에서의 인물은 바르트의 고백처럼 얇은 평면 위에 투영된 허상일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진 속에서) 나는 주제도 대상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대상이 되려고 하는 주제에 가깝다.”   이민호는 자아와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근원적 존재에 대한 질문들 말이다. 나는 누구이며 과연 타인들은 나를 나로 인정하고 있는 것에 대한 최초의 질문이자 마지막까지 던지는 그 질문을 그녀는 지금 시선이 사라진 사진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정 현/조형예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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