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근원, 그리고 이탈된 이미지들: 이민호의 휴대용 풍경과 자화상 - 고동연
2011-04-23 02:36:22 , Tuesday

La vie n'est pas ce que l'on a vecu, mais ce dont on se souvient et comment on s'en souvient. (인생이란 당신이 사는 것,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인생] 중의 당신이 기억하는 것들, 그리고 기억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 G.G. Marquez

현대인들은 수많은 이미지들 속에 둘러싸여 있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이중 삼중으로 재현되고 또 재현된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과연 일상생활에서 경험하게 되는 수많은 풍경들을 얼마만큼 제대로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을까?

이민호의 사진 작업에서 공장 굴뚝, 잔디를 심은 상자, 깃발, 바닷가 등의 풍경 이미지들은 원래의 시-공간적인 맥락으로부터 이탈하여 다양한 배경에 반복, 중첩되어서 등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관객들은 정확히 어떤 이미지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알 길이 없으며, 인터넷에 떠다니는 수많은 이미지들처럼 이민호의 ‘휴대용 풍경’은 고향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게 된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휴대용 자화상’ 시리즈에서도 작가의 코, 발, 손등 신체의 부분들과 그녀가 소장한 액세서리들만이 나열되어 있다. 게다가 작가는 관객이 자신을 알아볼 수 없도록 얼굴을 가리거나 돌리고 있다. 작가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얼굴이 삭제된 채로 나머지 부분들만이 부각되어 있는 셈이다.

결과적으로 근원(origin)을 잃어버린 풍경과 자화상들은 소위 문학 비평, 특히 프랑스에서 말하는 미궁 혹은 심연의 상태(mise en abîme)에 이른다. 이미지가 수없이 반복되고 복사되며 반사되어 어느 것이 원본인지 복사판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고, 그 출처마저도 묘연해지게 된다.

풍경을 옮기다.
이민호의 ‘휴대용 풍경’ 시리즈 이래로 변형된 각종 모양의 상자는 유사하거나 동일한 풍경들을 전혀 다른 맥락에 위치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하얀 소파가 위치한 풍경은 말라 비틀어져서 갈라진 초현실적인 풍경 위에 혹은 공사판 앞에 위치해 있다. 푸른 하늘의 정경을 담은 상자는 또 다른 하늘의 정경이 액자 너머로 보이는 이미지 앞에 놓여있다. 즉 상자는 이민호 작업에서 이동식 풍경화를 만들어 내는 주요 운송 수단이다.

예를 들어 작가가 프랑스에서 거주할 당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매일 아침마다 바라보던 공장 굴뚝의 이미지는 진달래가 무성하게 핀 밭, 정체 모를 벤치 위, 혹은 창고와 같이 생긴 건물 기와 앞에 놓인 반사경 내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간에 배지되어 있다. 여기서 전혀 무관해 보이는 배경에 위치한 굴뚝의 이미지들은 작가가 프랑스에서 바라본 원래 굴뚝과 어떠한 관계에 놓이게 되는가?⑴

⑴ 물론 사진은 언제가 지나간 것의 기록이어 왔고 동시에 더 이상 존재하는 않는 것의 현현이어 왔다. 이와 연관된 이론으로는 물론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1980)를 들 수 있다. 하지만 바르트의 경우 이미 지나간 것을 바라보는 보는 이의 관점의 변화에 따라서 사진의 의미가 변화한 것이라면 이민호의 작업에서 사진의 의미, 혹은 사진 속의 이미지가 변질된 것은 작가 스스로가 인위적인 방법과 사진 콜라주의 수법에 의해서 의도된 것이기 때문에 사진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속성의 결과라기 보다는 이민호의 작업에서 주요한 특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이와 같이 동일한 이미지들이 그 맥락으로부터 이탈하여 새로운 배경에 삽입된 경우를 ‘소외’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소외란 단순히 특정한 사회집단에서 개인이 느끼는 감정적인 반응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대신 작가가 주장하는 소외란 자신의 근원으로부터 이탈된 상태, 소위 ‘고향을 잃은 이미지’에 관한 것이다. 영어로는 자기 소외, 혹은 자신의 정체성으로부터의 소외(self-alienation)에 해당한다.

근원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서 특정성을 잃은 풍경들은 한편으로 새로운 나레티브나 의미를 생성하게 된다. 관객들은 사진이 찍혀질 당시 굴뚝의 상태, 그와 연관된 의미나 이야기들보다 전혀 새로운 환경에 위치한 굴뚝이 불러 일으키는 의미나 새로운 상징성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휴대용 풍경은 돌아 갈 곳을 잃은 일종의 ‘미아’나 ‘고아’에 해당한다. 지나치게 많은 곳을 여행하면서 변형되어 더 이상 그 근원을 잃어버린 고향 없는 풍경인 셈이다.

파편화된 나(작가)의 이미지
휴대용 풍경에서 풍경 사진들이 더 이상 원래적인 시/공간의 특수성을 재현해 내는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녀의 인물사진, 특히 자화상 또한 그 한계를 드러낸다. 이민호의 자화상 시리즈 ‘휴대용 자화상’의 경우 작가의 신체 부분들은 파편화되어 과연 작가에게 속한 것들인지 혹은 그저 인물의 정형화된 신체의 부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 혼란스러운 단계에 놓이게 된다.

이민호의 휴대용 자화상에는 작가의 모습, 그것도 발, 옆 모습, 목, 손 등이 차례로 부각되어 진다. 그리고 상자의 다른 면에는 때때로 작가가 직접 착용한 신발, 벨트, 그리고 자신의 얼굴 위로 우스꽝스럽게 들고 있었던 전구들이 놓여 있다. 하지만 그녀의 자화상에서 얼굴은 교묘하게 가려져 있는데, 작가가 평소 인물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얼굴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왔기에 이와 같은 선택은 더욱 흥미롭다. 작가는 얼굴, 특히 눈만 가리거나 자르고 찍은 사진들을 현상소에서 실패한 사진들인 줄 알고 돈을 받지 않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가 인물을 파악하는 방식이 전적으로 사회화, 혹은 사회적인 약속에 따른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얼굴을 감춘다는 것은 실은 대상 인물의 핵심적인 부분을 감추는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얼굴이 가리어진 채 다양한 신체의 부분이나 작가가 사용한 물건들로 이루어진 자화상은 결국 핵심과 무관한, 혹은 그 근원에 해당하는 정체성을 잃은 자화상이라고 불릴 수 있다.

작가의 내적 자아가 단순히 외향적인 것들로만 재현되어 왔다면 여성성의 경우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이민호는 <휴대용 자화상>에서 붉은 땡땡이 무늬를 여성성을 상징하는 사회적 코드로 상정하고 과연 여성성이 단순히 땡땡이로 장식된 옷을 입거나 액세서리를 통해서 재현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여성성과 연관된 수많은 이미지들이 범람하는 가운데 진정으로 여성성을 재현할 수 있는 방식을 탐구하기 위한 작업이다. 하지만 이민호의 사진에서 땡땡이 무늬는 무늬로만 남을 뿐 그것은 실제 여성에 의해서 향유되기 보다는 전시용 천으로 진열장에 놓여 있다.

풍경이 더 이상 그 원래적인 맥락에서 이탈하였듯이, 작가의 자화상이 더 이상 작가의 고정적인 정체성을 재현하는 수단이 될 수 없듯이, 땡땡이 무늬도 진정한 여성성과는 무관해 보인다. 결국 ‘여성성’이라는 것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특정한 시각적 코드에 의해서 이해되어지고 강조되어지며 교육되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럴 법도하다.

기억(근원)으로부터의 해방
작가는 맥락으로부터 이탈한 풍경, 얼굴 없는 자화상, 그리고 땡땡이 무늬만 남은 여성성을 통해서 이미지의 ‘자기 소외’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하지만 과연 이미지들의 근원(그것의 원래 상태나 정체성)에 대하여 아직도 논할 수 있는가? 만약 그 근원 자체가 원래부터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면 더 이상 ‘소외’ 자체가 문제시 될 이유는 없지 않은가?

한편으로 작가는 인생이란 결국 사는 것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생의 사건들 중에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는가의 문제라는 남미 문호 가브리엘 마르케즈의 말을 상기하면서 이미지의 원래적인 상태, 정체성, 여성성에 대한 향수에 잠긴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어설픈 기억, 즉 이미지들의 소위 원래적인 모습이나 근원에 대하여 집착하지도 않는다. 결국은 기억이라는 것도 가변적인 시점에서 행해진 일이며, 기억의 유동성이야 말로 다양한 재현의 방식을 추구하는 사진 작가에게는 더 없는 축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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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y, Origin and Breakaway Images: The Portable Landscapes and Self-Portraits of Lee Min-ho - Koh Dongyeon, art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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